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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를 사랑한 여자
2008-09-17
남편 요한은 내 눈치를 살핀 뒤 드라이브 하며 밖에서 식사나 하자고 제의했다.
마음을 헤아려 주는 남편이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진다. 
10 년 전에도 우리는 이 남한산성 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서로의 배우자를 꽁꽁 언 땅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창 밖만 응시할 뿐 항상 말이 필요치 않았다. 특히 마음이 허허롭고 공허할 때면 우리는 이 길을 택해서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고 흰 눈이 소복히 내려앉을 때까지. 
그 당시 나는 화가인 남편을 여의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지금의 남편도 그의 아내를 잃었다.
그것도 같은 병실에서. 같은 중환자 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누워 있다가 같은 병원 영안실 바로 그 자리에서 장례의식을 치렀다. 그리고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성당 공원 묘지 윗 쪽과 아랫 쪽에 각각 유택을 마련하여 떠난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란 예견된 것일까. 모두들 우리를 보고 혀를 찼다. 

나는 매년 흰 눈이 내릴 때면 하늘을 올려다 보는 습관이 생겼다.
10 년 전 겨울이 물러갈 즈음 바람 부는 언덕에 남편을 묻?돌아서려는데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날도 흰 눈발이 하나 둘 내 검은 상복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작은 딸을 낳은 내게 수고했다며 그이가 웃으면서 내밀던 흑장미 다발을 떠올렸다. 그런데 흰 눈이 내리던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는 듯 내 눈에는 빨갛게 보였다. 
내 나이 서른 다섯 살. 사랑하는 남편을 영원히 떠나 보낸다는 것은 당해 본 사람만이 그 심정을 알 것이다. 착하고 다정다감했던 남편과는 8 년을 함께 살았지만 시시하게 살아온 여느 부부의 30 년 세월보다도 나한테는 더 값지고 소중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며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이는 나한테 가르쳐 주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그이와 나. 핸드백, 액세서리, 구두 등 나의 모든 물건은 그의 감각으로 골라 준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에 대단히 만족하며 아꼈었다. 그 물건들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남편의 체취를 느꼈다. 
나는 넥타이, 점퍼, 벨트 등을 남편에게 자주 사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너무 좋아했고 자기가 가르치는 여고생들에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랑도 했었다. 우리는 그 사소한 물건들을 마르고 닳도록 오랫동안 사용했었다. 마치 사랑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러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런 남자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남편이 떠나자 나는 남편을 위하여 L 백화점에서 유작전을 열었다. 전시회 마지막 날 지금의 남편 요한은 전시회 안내 팜플렛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초췌한 모습이었던 그는 그림 관람보다는 나를 만나기 위한 명분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우리는 남한산성 드라이브를 하기 시작했다. 
전 남편이 떠나기 전 병원에 있을 때 나는 시 아버지와 함께 병 간호를 했고 요한은 장모 되는 사람과 함께 그의 아내의 병실을 지켰다. 하루 세 번의 면회 시간이면 시 아버지와 요한은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공교롭게도 종교가 같았기에 서로 환자의 쾌유를 기도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오늘은 좀 어떠세요?"
"글쎄, 아직도..."
나는 면회 시간을 제외하고는 병원 3 층에 마련된 성당에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에 하루를 지탱할 힘이 없었다. 
나는 마치 내조를 잘못해서 남편이 몹쓸 병에 걸린 것만 같아 죄책감에 사로 잡혀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바닥만 내려다 보았다. 더구나 새파란 새댁이어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이 더욱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라 묵주를 돌리며 기도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넓은 성당 안에서 혼자 기도하다 보니 인기척이 났다. 
기도하는데 몹시 분심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 보지도 않은 채 어떤 가족인지는 몰라도 하루 속히 쾌차 되어 병실에 올라 가던지 아니면 퇴원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의 남편 요한이 나처럼 기도하러 가끔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성모님을 닮아서 놀라웠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환자를 위해서 유난히 헌신적이어서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부럽기까지 했다고도 했다. 
사실 나는 요한을 언뜻 본 적이 있기는 했다. 얼굴 생김새까지는 모르겠고 불룩 나온 배와 체크 무늬 넥타이만 보고 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그 환자의 가족이란 것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새벽 미사 때에도 나는 고개만 숙이고 있어서 줄무늬 넥타이만 더러 눈에 들어왔다. 
그 후 2 년이 지난 뒤 우리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 남자를 가슴 한쪽에 묻고 다시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 열쇠를 하나 채웠다. 절대로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을 비교하며 살아가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남편의 초등학교 2 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1 학년과 네 살짜리인 내 딸들은 고운 색동 한복을 입고 엄마 아빠의 들러리를 섰다. 2 층에서 축가를 부르던 성가대원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구경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새 둥지를 틀었고 다섯 식구가 새 삶을 엮어 나가게 되었다. 
내 아이들의 친가와 외가에서는 내가 일부종사 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보수적인 친정 아버지는 재혼에 대해서 부정적이셨고 반대가 심했다. 큰 딸의 앞 날도 걱정이려니와 집안의 체면을 더 중요시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눈도 곱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더구나 양쪽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하면 서로 힘들다는 고정관념들이 있었다. 그러나 10 년이 지난 지금은 다른 것 같다. 시대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변화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아이들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미우면 그들의 아이들도 미워진다는 것. 그러나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면 아이들도 사랑스러워지고 상대의 아이들에게 더 부족함이 없이 대해주고 싶고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금슬이 좋으면 편안해 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보인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이지 결코 밥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구나 요즘 세상에는 못 먹어서 병든 아이보다 사랑에 굶주려서 병이 든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방황하면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기 쉽다. 
내가 혼자가 되고 보니 남편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나에게 남편인 동시에 아버지 같았고 때로는 오빠처럼 든든한 울타리였는데 그 든실한 울타리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보니 내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고 교사였던 전 남편 덕분에 나는 그이가 살아 있었을 때 사모님 소리도 들으며 살았고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풍요로웠었다. 행복이란 게 별 게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남편 때문에 신분이 상승되었고 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편이 떠나고 나니 내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했다. 측은하게, 혹은 연민의 정으로 때로는 약간 무시하는 친척들도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 당당하게 혼자 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남녀가 함께 서로의 힘을 합쳐 살아가며 종족 보존을 위해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고 모양이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나는 당당하게 재혼했다. 그리고 세 딸들을 여자로만 키우고 싶진 않았다. 한 인간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키우려 애썼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큰 재목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가 있는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큰 아이는 얼굴이 어둡다. 며칠 전부터 입이 나오고 말이 없어졌다. 어미는 아이의 눈치를 살피려니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해댄다. 9 년 동안 줄곧 10 개의 손가락을 모두 빨고 손톱을 물어 뜯는 습관 때문에 그 동안 아이와 나는 많은 고생을 해왔다. 별의별 방법을 모두 동원해 보았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우유를 먹고 자란 탓도 있지만 일곱 살이 되도록 병든 제 어미 곁에서 손가락을 빨며 그림책을 끼고 놀았단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1 학년이 되도록 오래 된 습관을 고치기 어려웠다. 생인손을 앓는 아이 마냥 빨갛게 피멍든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거의 매일 계속되는 일로 9 년 동안 실랭이를 해왔다. 입에 손을 넣지 않기로 수 없이 약속했다. 그리고 어기면 마음은 아팠지만 손바닥도 때렸다. 서로 끌어 안고 울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해왔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아니므로 쉽게 말한다. 
"크면 저절로 고쳐 지는데 어미가 성격이 워낙 예민해서 그 꼴을 못 본다."
아이는 학교나 학원에서 지루한 학과 시간을 보낼 때면 정신 없이 손톱을 뜯어 댔다. 그러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다. 때로는 정서 불안 증세를 보이며 눈까지 풀어져서 계속 손톱 뜯는 일에 열중이다. 
그런 아이를 보면 내 십자가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아이와 나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급기야는 내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혈액순환이 안 되는지 온 몸이 굳어 오고 허리 디스크까지 발생했다. 그 뿐인가. 자궁에 혹이 생겨 생리 때만 되면 주먹만한 핏덩이가 쑥쑥 빠졌다. 게다가 불행은 항상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IMF 체제가 되어 남편의 사무실은 문을 닫게 되었다. 
연애할 때에는 내가 어려울 때면 도와 주겠노라던 남편은 위기를 피하기 위해 가출해 버렸다. 빚쟁이들을 피해 연락이 닿는 곳에 같은 처지의 친구와 함께 있다고 했다. 뒷 수습은 모두 내 몫이었다. 태어나서 그 때처럼 힘들었던 적이 있었을까. 저녁에 잠자리에 누울 때면 이대로 영원히 일어나지 말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중학교 3 학년, 중학교 2 학년, 초등학교 4 학년의 딸을 가진 엄마는 침착해야만 했다. 사춘기인 아이들에게 아빠는 출장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빠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면 안되겠고 무엇보다도 정서적으로 불안하면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두려웠다. 아이들 앞에서는 연극 배우처럼 웃으며 태연한 척 했고 저녁이면 잠자리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실컷 울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실컷 울다가 생각해 보니 남편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남편은 그 동안 열심히 일해왔다. 그러다가 IMF 때문에 실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좌절하며 자꾸 무기력해져갔다. 그런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부부란 무엇인가. 밤이 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부부는 원래 하나인 것이다. 서로 다른 반쪽이 만나서 부족한 것은 보충해 주며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지고 남편을 향해 넉넉한 마음이 생겨났다. 이번에는 내가 남편을 도울 차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집에 아아들을 모아 놓고 논술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학교에서,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해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절반이 넘는 숫자가 입상을 하고 보니 아파트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공부하고자 하는 아이들이 물 밀 듯이 몰려 왔다. 나는 눈물이 나서 며칠을 또 울었다. 제자들과 내 아이들이 왠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학부형들은 내게 고마움의 표시로 김치도 담그어 주고 케이크도 손수 구워서 보내왔다. 인간이 인간을 가르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실업 자금을 대출 받아 남편의 급한 빚도 갚았고 아이들 과외비며 학원비는 그런대로 충당이 되었다.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더니 나한테도 그런 힘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 집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남편은 처남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모두가 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다. 예전보다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큰 아이. 입에 손을 넣는 버릇이 어느 새 없어져 버렸다. 가끔 식탁에 마주 앉을 때마다 나는 큰 아이의 길쭉하고 예쁜 손가락을 몰래 훔쳐 본다. 아직은 괜찮은 듯 싶다. 내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0 년의 세월이 내 가정을 튼튼한 사랑의 끈으로 꽁꽁 묶어 놓은 것만 같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편과 내 모습이 처음부터 너무나 닮았다며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10 년을 살다 보니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닮아가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 배웅에 나선 나에게 남편을 뒤를 돌아보며 몇번이고 손을 흔든다. 마치 학교 길에 배웅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행복이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라고. 나는 요즘 마음이 고요하고 한없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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